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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나시 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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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파나시 페트는 1820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14세에 성이 바뀌는 등 복잡한 가족사를 겪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학과 문헌학을 공부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첫 시집을 출판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군 복무, 결혼, 농장 경영 등 다양한 삶을 살았으며, 만년에는 신분 회복과 함께 시집을 출간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페트는 '순수 예술'을 옹호하며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를 썼으며, 러시아 상징주의를 비롯한 후대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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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나시 페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Afanasiy Afanasyevich Fet
로마자 표기Shenshin
직업시인
출생 및 사망
출생일1820년 12월 5일
출생지므첸스크, 러시아 제국
사망일1892년 12월 3일
사망지모스크바, 러시아 제국
국적러시아
가족 관계
친척블라디미르 세멘코비치
일리야 레핀의 페트 초상화, 1882년
일리야 레핀의 초상화, 1882년
서명

2. 생애

만년의 페트


아파나시 아파나시예비치 페트(본명 셴신)는 1820년 러시아 제국 오룔현 므첸스크 인근 노보세요르키 영지에서 러시아인 지주 아파나시 셴신과 독일인 샤를로테 베커 사이에서 태어났다.[25][1] 하지만 부모의 결혼이 러시아법상 인정되지 않아 14세 때 아버지의 성 '셴신'과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어머니의 전 남편 성인 '페트(Foeth)'를 따라야 했다.[2] 이 일은 페트에게 평생 큰 정신적 상처와 불만으로 남았으며, 잃어버린 신분을 되찾는 것이 그의 오랜 숙원이 되었다.[4][7]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학과 문헌학을 공부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고,[7] 1840년 첫 시집 ''서정적 판테온''을 출간하며 문단에 등장했다.[5] 초기 그의 시는 비사리온 벨린스키 등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8][9] 1844년 대학 졸업 후, 귀족 신분 회복을 목표로 군에 입대하여 헤르손현 등에서 복무했다.[5] 이 시기 마리아 라지치와의 비극적인 사랑과 그녀의 죽음은 그의 삶과 시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25][13]

1850년대 문학 활동을 재개하여 《소브레메니크》 등 주요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고,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등과 교류하며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5] 특히 톨스토이는 페트의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누었다.[2][32] 1857년 마리아 보트키나와 결혼하고 이듬해 군에서 퇴역한 후,[5] 오룔현의 스테파노프카 영지를 구입하여 농장 경영에 몰두하며 한동안 문학 활동을 중단했다.[7][5] 이 시기 그는 성공적인 지주이자 지역 치안 판사로 활동했다.[5]

1873년, 53세의 나이로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 황제로부터 셴신이라는 성과 귀족 신분을 되찾았다.[7] 이반 투르게네프는 이를 두고 "페트의 소멸과 셴신의 등장"이라며 다소 냉소적으로 평하기도 했으나,[23] 페트 본인에게는 오랜 염원의 성취였다. 신분 회복 이후 그는 쿠르스크 인근의 보로비요브카 영지를 구입하고 다시 왕성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만년의 대표작인 시집 ''저녁의 불빛'' 시리즈(1883-1891)를 발표했다.[13][7]

1892년 문학 경력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고, 같은 해 카메르게르 칭호를 받았다.[25] 그해 11월 21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4]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 시도 논란이 있었으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로 기록되었다.[24] 그는 오룔현 클레이묘노보에 있는 셴신 가문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5][24]

2. 1. 출생과 성장 배경

아파나시 페트는 1820년 12월 5일, 러시아 오룔주 므첸스크 인근 노보세요르키(Novosyolki) 영지에서 44세의 러시아 지주 아파나시 셴신(Afanasy Shenshin)과 22세의 독일 여성 샤를로테 베커(Charlotte Becker) 사이에서 태어났다.[25][1] 샤를로테는 독일 다름슈타트여관 주인이었던 칼 베커의 딸이었다. 셴신은 독일 방문 중 샤를로테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이미 다름슈타트 법원 관리인 요한 푀트(Johann Foeth)와 결혼하여 딸 카롤리나를 둔 상태였으나,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셴신을 따라 러시아로 왔다.[25][1] 그녀는 러시아에 도착한 후 남편 요한 푀트와 이혼하고 셴신과 다름슈타트에서 루터교 의식으로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러시아 법률상 적법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1월, 샤를로테는 셴신의 영지에서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아파나시 아파나시예비치 셴신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2]

하지만 14년 후, 셴신과 베커의 결혼이 러시아에서 법적으로 무효임이 밝혀지면서, 아파나시는 아버지의 성 '셴신'을 사용할 권리와 그에 따른 귀족으로서의 모든 이익을 박탈당하고 어머니의 전 남편 성인 '푀트(Foeth)'를 따라야 했다.[2] 이는 그가 법적으로 '사생아' 취급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했으며, 어린 아파나시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름슈타트의 요한 푀트 역시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3] 레프 톨스토이의 처제인 타티야나 쿠즈민스카야에 따르면, 페트의 "삶에서 가장 큰 불만은 그가 (그를 동등하게 대했던) 그의 형제들과 같은 적법한 셴신이 아니라, 독일계 유대인 푀트의 혼외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4] 그는 페트라는 이름이 자신의 시를 통해 셴신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으며, 이는 레프 톨스토이가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한 부분이기도 했다.[2][5] 그는 53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의 성을 되찾지 못했다.

14세가 되자 그는 에스토니아 베루(당시 리보니아현의 일부)에 있는 독일계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1837년에는 역사가 미하일 포고딘(Mikhail Pogodin)이 운영하는 모스크바의 사립 기숙학교로 전학했다. 이듬해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1844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잃어버린 귀족 신분을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군에 입대하여 남부 우크라이나헤르손현에 주둔한 기병 연대 장교가 되었다. 크림 전쟁 시기에는 에스토니아 해안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2. 2. 청소년기와 교육

1860년 아파나시 페트, 안드레이 데니에르의 사진


14세 때 아파나시 셴신은 에스토니아 보루에 있는 독일어 기숙 학교에 보내졌다.[6] 그곳에서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더 이상 셴신이 아닌 페트(Fet)가 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주인을 잃은 개와 같은" 기분이었다고 솔직하게 표현했다.[7] 1837년에는 모스크바로 옮겨 역사학자 미하일 포고딘이 운영하는 기숙 학교에 다녔다.

1838년 가을, 페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 문헌학을 공부했다.[7] 대학 1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훗날 괴테, 하이네, 야지코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5] 대학 시절, 동료 학생이자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아폴론 그리고리예프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페트는 그리고리예프의 자모스크보레치예 지역 집에 있는 2층 작은 방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다른 친구들인 야코프 폴론스키, 세르게이 솔로비요프와 자주 교류했다.[7] 그리고리예프의 시 쓰기에 대한 생각은 젊은 페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3]

1830년대 후반, 페트는 자신이 쓴 시 몇 편을 포고딘에게 보여주었고, 포고딘은 이를 니콜라이 고골에게 보내 의견을 구했다. 고골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으며,[7] 이에 용기를 얻은 페트는 1840년 자신의 첫 시집인 ''서정적 판테온''을 'A.F.'라는 이니셜로 출판했다.[5] 이 시집은 먼저 표트르 쿠드럅체프 교수에 의해 ''오테체스벤니예 자피스키''에서 호평을 받았고, 이후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 벨린스키는 몇 년 후 "살아있는 러시아 시인 중 페트가 가장 재능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8][9]

1841년에는 시 "포세이돈"이 ''오테체스벤니예 자피스키''에 실렸는데, 이는 그의 성 '페트'가 명시되어 출판된 첫 작품이었다. 그의 성 표기가 원래 독일식 철자(Föth, 표트)에서 러시아식(Fet, 페트)으로 바뀐 것이 단순한 인쇄상의 실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전기 작가 타르호프에 따르면 이 변화는 중요했다. 이로써 '헤센-다름슈타트 시민'의 성이 러시아 시인의 필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2]

1842년부터 1843년까지 페트의 시는 ''오테체스벤니예 자피스키''와 ''모스크비티야닌''에 정기적으로 게재되었으며, 후자의 편집자인 스테판 셰비료프는 그의 멘토 역할을 했다. 그의 시 중 일부는 1843년 알렉세이 갈라호프가 엮은 시집 ''러시아 시의 최고''에 포함되었다. 특히 시 "새벽에 그녀를 깨우지 마세요..."(На заре ты её не будиru)는 작곡가 알렉산드르 바를라모프에 의해 곡으로 만들어져 인기 있는 러시아 로망스가 되었다.[13]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페트는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친구 아폴론 그리고리예프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 ''오필리아''에서 "내 인생에서 우울함에 이렇게 시달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자살할 가능성은 나를 매우 공포스럽게 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페트는 깊은 우울감에 시달렸다.[10] 페트는 1844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했다.

2. 3. 문학 활동과 군 복무

러시아 육군 장교 시절의 아파나시 페트


1844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한 페트는 그해 늦여름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었다.[5] 1845년 초, 그는 노보시올키 영지를 떠나 헤르손으로 향했고, 4월에는 잃어버린 귀족 신분과 성(姓)을 되찾기 위해 제국 흉갑기병 연대에 소위로 입대했다.[5] 이는 셴신 가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페트는 군 생활에서 엄격한 규율 외에는 별다른 즐거움을 찾지 못했으며,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산 채로 매장된' 기분이라고 편지에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헤르손에서의 경험을 "괴물들 사이의 삶"에 비유하며, "매시간마다 또 다른 비이가 다가와 미소를 기대한다"고 묘사했다.[11][12]

1848년 가을, 페트는 스무 살의 마리아 라지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교육받은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페트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가난한 지주의 딸이었던 그녀와의 결혼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한 페트는 결국 그녀를 떠나보냈다. 1851년 마리아는 자신의 드레스에 불이 붙는 사고로 사망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단순 사고로 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고 여긴 "자존심 강하고 절망적인 소녀"의 비극적인 선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리아는 심한 화상을 입고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마지막 순간 "그를 탓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25] 이 사건은 페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깊은 후회와 슬픔을 안겼고, 마리아의 모습은 그의 후기 시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13]

1840년대 후반, 몇 년간 중단했던 시 창작 활동을 재개했다. 1850년 《A. 페트의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판하며 러시아 문학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13] 1853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주둔한 울란 연대로 전출되었고, 크림 전쟁 기간에는 에스토니아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2] 같은 해,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권유로 문학 잡지 《소브레메니크》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옛 친구인 이반 투르게네프, 바실리 보트킨과 재회했다. 투르게네프의 집에서 페트는 크림 전쟁에서 막 돌아온 젊은 장교 레프 톨스토이를 처음 만났으며, 이 만남은 평생 이어질 깊은 우정의 시작이 되었다.[5] 네크라소프는 페트를 시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다른 작가들, 심지어 자신의 작품보다 그의 시를 더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톨스토이는 페트에 대해 "이 선량하고 통통한 장교에게서 나오는, 위대한 시인의 진정한 특징인 이 기적적인 시적 대담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며 그의 시적 재능에 감탄했다.[2]

1856년에는 《A.A. 페트의 시》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1850년 시집을 상당 부분 수정하고 편집한 개정판이었다.[14] 작가이자 회고록 작가인 아브도탸 파나예바에 따르면, 페트는 네크라소프와 투르게네프에게 이 시집의 편집 전권을 위임했다. 네크라소프는 광범위한 수정에 반대했지만, 투르게네프는 과감한 삭제를 주장했고 결국 그의 의견이 관철되었다.[15] 네크라소프는 이 시집 서문에서 "푸시킨 이후 단 한 명의 시인도 페트처럼 시를 깊이 이해하고, 영혼을 열어젖힐 준비가 된 이들에게 이토록 큰 기쁨을 선사하지 못했다. 이는 두 시인이 동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페트가 자신의 영역에서 푸시킨이 그의 더 광대하고 다채로운 영역에서 그러했듯 뛰어나다는 뜻이다"라고 극찬했다.[2]

1856년, 페트와 네크라소프의 시집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될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이념적 차이로 인해 소원해진 상태였다. 1859년 표도르 튜체프에 관한 평론에서 페트는 "시의 사회적 사명, 도덕적 가치 또는 현실적 적합성이 예술성 자체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악몽과 같다. 나는 오래전에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났다"고 밝히며 '예술을 위한 예술'에 가까운 자신의 문학관을 분명히 했다. 이는 당시 사회 참여적 문학을 중시하던 《소브레메니크》의 주요 필진들과의 간극을 더욱 벌렸고, 결국 그해 말 페트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가 주도하던 잡지를 떠났다.[2]

1857년 페트는 마리아 보트키나(바실리 보트킨의 여동생)와 결혼했고, 이듬해인 1858년 군에서 퇴역하여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의 영지를 관리하며 시 창작과 번역 활동에 전념하며 만년을 보냈다.

2. 4. 사랑과 상실



1844년 대학교를 졸업한 페트는 그해 늦여름 어머니를 암으로 잃었다. 1845년 초, 그는 노보시올키 영지를 떠나 헤르손으로 향했고, 4월에는 셴신 가문의 전통에 따라 잃어버린 성과 귀족의 특권을 되찾기 위해 제국 흉갑기병 연대에 소위로 입대했다.[5] 그는 군 생활에서 규율 외에는 즐거움을 찾지 못했으며,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산 채로 매장된' 기분이라고 편지에 토로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괴물들 사이의 삶"이라 묘사하며, "매시간마다 또 다른 비이가 다가와 미소를 기대한다"고 쓰기도 했다.[11][12]

1848년 가을, 페트는 스무 살의 마리아 라지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교육을 잘 받은 지적인 소녀였고, 그를 사랑했다. 가난한 헤르손 지주의 가난한 딸과 결혼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페트는 그녀를 버렸다. 1851년 마리아는 드레스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사고일 수 있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남자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결정한 "자존심 강하고 절망적인 소녀"의 마지막 선언으로 보았다. 마리아는 화상으로 4일 후에 사망했고,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를 탓하지 마세요"였다고 한다.[25] 깊은 후회의 감정이 페트를 평생 괴롭혔다. 이 사건과 마리아의 모습은 그의 후기 시에서 자주 언급될 것이다.[13]

1840년대 후반, 몇 년간 중단한 후, 페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50년, 《A. 페트의 시》라는 시집이 출판되면서 그는 러시아 문학계로 성공적으로 복귀했다.[13] 1853년 그는 인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한 울란 연대로 전출되었다. 크림 전쟁 동안 그는 에스토니아 해안을 경비하는 부대에서 복무했다.[2] 1853년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페트에게 《소브레메니크》에 합류하도록 초대했고, 그곳에서 그는 그의 옛 친구 이반 투르게네프와 바실리 보트킨과 재회했다. 투르게네프의 집에서 페트는 레프 톨스토이를 만났는데, 그는 당시 크림 전쟁에서 막 돌아온 젊은 장교였으며, 이는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졌다.[5] 네크라소프는 페트를 시인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심지어 자신의 작품보다 그의 작품을 분명히 더 선호했다. 레프 톨스토이는 "이 선량하고 통통한 장교에게서 나오는 위대한 시인의 진정한 특징인 이 기적적인 시적 대담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고 궁금해했다.[2]

《A.A. 페트의 시》는 1856년에 출판되었지만, 1850년 그의 책을 재작업하고 편집한 것에 불과했다.[14] 작가이자 회고록 작가인 아브도탸 파나예바에 따르면, 페트는 네크라소프와 투르게네프에게 이 선집을 편집하는 데 백지 위임을 주었고, 전자는 광범위한 편집에 반대했지만, 후자는 과감한 삭제를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이 이겼다.[15] 이 책의 서문에서 네크라소프는 이렇게 썼다. "푸시킨 이후 단 한 명의 시인도 페트처럼 시를 이해하고 영혼을 기꺼이 열어젖히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기쁨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둘이 동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페트는 그의 분야에서 푸시킨이 그의 더 광대하고 다채로운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훌륭하다는 것이다."[2]

1856년, 페트와 네크라소프의 시집이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을 때,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는 이미 이념적 차이로 인해 긴장된 상태였다. 1859년 표도르 튜체프에 관한 에세이에서 페트는 이렇게 썼다. "시의 사회적 사명, 도덕적 가치 또는 적합성이 예술적 측면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나에게 악몽과 같다. 나는 오래전에 이 생각을 포기했다." 《소브레메니크》의 나머지 직원들과의 균열이 분명해졌고, 그해 늦게 페트는 이제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가 지배하는 저널을 떠났다.[2]

2. 5. 결혼과 은퇴

1857년, 파리에서 아파나시 페트는 친구이자 문학 평론가인 바실리 보트킨의 딸 마리아 페트로브나 보트키나와 결혼했다. 그녀는 부유한 차 상인의 딸이었으며, 남편을 세심하게 돌보는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묘사된다.[16] 1858년, 페트는 군 복무에서 물러나 모스크바로 돌아왔다.[5]

이듬해 그는 오룔 현 므첸스크 지역의 스테파노프카 후토르를 구입했고, 1860년 그곳으로 이사했다.[7] 이후 14년 동안 그는 이곳을 번성하는 정원으로 가꾸고, 말 사육 농장을 운영하며 제분소를 짓는 등 성공적인 농업 사업을 일궜다.[5] 1862년부터는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농업 경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17] 이러한 활동은 미하일 살티코프-시체드린 등으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살티코프-시체드린은 "땅 구멍 속으로 사라진 이들 중 하나가 페트인데... 여가 시간에 멋진 로맨스를, 다음에는 인간 혐오적인 에세이를, 또 다음에는 로맨스를, 그리고 더 많은 인간 혐오를 번갈아 생산한다"고 비꼬았다.[18] 1867년부터 1877년까지 11년간 페트는 지역 치안 판사로 활동하며 농민과 지주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5]

같은 시기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로 은퇴한 레프 톨스토이는 페트가 농촌에 정착하기로 한 결정을 지지했다.[19] 그러나 더 나은 창작 환경을 찾아 시골로 간 톨스토이와 달리, 페트는 글쓰기를 거의 중단했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1861년 폴론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트가 "농학자, '절망에 빠진 지주'가 되어 수염을 기르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며 모든 정기 간행물을 열정적으로 비난한다"고 전했다.[20] 페트 자신은 군 장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때 나는 가난한 연대 부관이었지만, 지금은 신의 은총으로 오룔, 쿠르스크, 보로네시의 지주가 되어 공원이 있는 아름다운 영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음모가 아닌 힘든 노동으로 이루었습니다"라고 쓰며 자신의 성공이 노력의 결과임을 강조했다.[21]

2. 6. 신분 회복과 만년

''알테르 에고''. 1875년 시 자필


1860년대 페트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번역했다. 1859년에 출판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번역은 소브레멘니크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22] 페트 자신도 나중에 "나에게는 극작가의 재능이 전혀 없다"고 인정했다. 1862년부터 1871년까지 ''러스키 베스트니크'', ''리테라투르나야 비블리오테카'', ''자랴'' 잡지에 게재된 에세이 모음집 ''마을에서''와 ''평민 노동에 대한 메모''에는 소설과 단편 소설도 실렸는데, 특히 알코올 중독에 빠진 시골 의사의 몰락을 그린 단편 소설 ''골츠 가족'' (1870)은 그의 산문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페트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자주 그를 방문했던 레프 톨스토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7]

1873년 페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트라는 이름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언급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내 삶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나타낼 단 하나의 이름을 대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페트'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쓸 정도로 자신의 성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7] 같은 해, 러시아 제국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페트에게 그의 양아버지 성인 '셴신'을 되돌려주고 러시아 귀족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오랜 염원을 이루어주었다. 이에 대해 이반 투르게네프는 "페트의 소멸과 셴신(Shenshin)의 등장"이라며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레프 톨스토이는 페트가 겪어온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용기와 인내심을 높이 평가하며 지지했다.[23] 공식적으로 셴신이 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페트'라는 필명을 사용했다.[7]

1873년, 페트는 쿠르스크 근처에 있는 두 번째 마을인 보로비요브카를 구입했고, 이곳에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891년 콘스탄틴 로마노프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로비요브카에서 나의 뮤즈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내 인생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자주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7] 1881년에는 모스크바 플류쉬치하 거리에 작은 집을 구입하여 겨울에는 도시에서 보내고, 4월부터 9월 말까지는 보로비요브카에 머물렀다.[2] 이 시기 창작 열정의 결과물로 그의 대표작 중 일부를 포함하는 ''저녁의 불빛'' 시리즈 네 권(1883년, 1885년, 1888년, 1891년 출간)이 탄생했다.[13]

페트는 부유한 지주로서의 삶과 그의 시 세계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는 비판에 맞서, 자신의 실용적인 생활 방식이 오히려 예술적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고 주장했다.[13]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고, ''저녁의 불빛'' 시리즈는 판매 부진을 겪었다. 레프 톨스토이,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 니콜라이 스트라호프, 야코프 폴론스키,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 표트르 차이콥스키 등 가까운 친구들만이 그의 만년 시를 높이 평가했다. 야코프 폴론스키는 1890년 편지에서 "나는 당신의 ''저녁의 불빛'' [4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지식인들도 그렇듯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7]

1890년에는 페트의 회고록 ''나의 기억: 1848–1889'' 두 권이 출판되었고, 또 다른 회고록인 ''나의 어린 시절''은 사후인 1893년에 출판되었다.[2] 1892년 1월 28일, 모스크바 헤르미타주 레스토랑에서 그의 문학 경력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페트는 겉으로는 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였으나, 나중에 시 ''나의 뮤즈의 50번째 생일에''에서 이 행사를 '진혼곡'에 비유하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26일, 그는 황제의 칙령에 의해 카메르게르 칭호를 받았다.[25] 그의 마지막 시는 1892년 10월 23일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7]

3. 작품 세계

페트는 시인이 '이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며, 아름다움, 사랑,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순수 예술'을 추구했다.[2][13] 그는 시를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여기고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였기에[37], 사회 참여를 중시하던 당대 문단에서는 투르게네프톨스토이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폭넓은 이해를 얻지 못했다.[37] 그러나 그의 시는 후대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 등 여러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20세기 상징주의 문학의 등장과 함께 재평가받았다.[38]

3. 1. 주요 주제와 특징



페트는 시인이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가지 삶의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생각을 옹호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오직 이상적인 영역만이 더 높은 삶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2] 페트에게 이 영역은 아름다움, 사랑, 인간 영혼과 무한한 코스모스의 조화, 그리고 예술 그 자체를 의미했다. 전기 작가 타르코프는 이상에 대한 갈망이 페트 시의 핵심 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2] 1859년 튜체프에 관한 에세이에서 페트는 '순수 예술'은 오직 '순수한 사랑'(바실리 주콥스키가 러시아 문학에 도입한 개념)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40년대에는 이런 생각이 매력적이었으나, 사실주의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1860년대에는 페트를 고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2]

페트는 자연철학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보이는 관계와 보이지 않는 관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전체성'을 추구하며 자신의 시를 "봄", "여름", "가을", "눈", "멜로디", "점"과 같은 주기로 묶었다. 각 주기는 영혼의 특정 측면을 나타내며, 인간 인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와의 융합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룬다. 페트는 '외부의 삶', 즉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만 인간이 절대적인 자유의 순간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얻는 기쁨의 순간('일체감')은 인간을 부패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황홀경과 완전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고 보았다.[13]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페트에게는 이러한 자연 및 이상 세계의 중요한 일부였으며, 그는 자신의 미학에 따라 소피아 톨스타야를 비롯한 여러 여성에게 시를 헌정하기도 했다.[13]

시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37],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36] 그는 그리스 미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자연, 음악, 사랑을 노래하는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투르게네프톨스토이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동시대 문인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37] 대학 시절에는 독일 시인 하이네괴테, 슬라브주의 시인 야지코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 등 여러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어 가곡의 가사로 널리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데카당스상징주의 시인들이 러시아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페트의 작품은 재평가받기 시작했다.[38] 그의 만년 대표작으로는 시집 《저녁의 불빛》 시리즈가 있다.[13]

3. 2. '순수 예술' 옹호

독일 시인 하이네괴테, 슬라브주의 시인 니콜라이 야지코프의 영향을 받은 것은 대학 시절로 여겨진다. 당시 러시아 문학계에서는 시가 시민으로서의 관심을 노래하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페트는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고[36], 시를 현실로부터의 도피 수단으로 생각했다[37]。 그는 그리스 예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자연, 음악, 사랑을 주로 노래했다. 이러한 예술 지상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페트는 투르게네프톨스토이 등 소수의 문인을 제외하고는 동시대인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37]。 반면, 그의 시는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 등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 가사로 채택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데카당파상징주의 시인들이 러시아 시를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페트의 작품은 재평가받게 되었다[38]

3. 3. 자연과의 교감

페트는 시인이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생각을 지지했다.[2] 그는 회고록에서 "오직 이상적인 영역만이 더 높은 삶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이 영역에는 아름다움, 사랑, 인간 영혼과 우주 사이의 조화, 그리고 예술 자체가 포함된다고 보았다.[2] 이러한 이상에 대한 갈망은 페트 시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2]

페트는 자연철학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보이는 관계와 보이지 않는 관계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여겼다.[13] 그는 '전체성'을 추구하며 자신의 시를 "봄", "여름", "가을", "눈", "멜로디", "점"과 같은 주기로 묶었다. 각 주기는 인간 영혼의 특정 측면을 나타내며, 인간 인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와의 융합이라는 주제로 통합된다.[13] 페트는 자연과의 소통, 즉 '외부의 삶'만이 인간에게 절대적인 자유와 기쁨의 순간('일체감')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자연은 자체적인 영혼을 지닌 존재였으며, 자연과의 일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부패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황홀한 기쁨과 완전한 행복을 얻는 길이었다.[13]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이러한 자연과의 조화로운 그림의 일부로 여겨졌다.[13]

대학 시절 하이네괴테 같은 독일 시인과 슬라브주의 시인 니콜라이 야지코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6] 당시 러시아 문학계에서는 시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페트는 경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다소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입장을 보이면서[36] 시를 현실로부터의 도피 수단으로 생각했다.[37] 그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자연, 음악, 사랑을 노래하는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였으나, 이 때문에 투르게네프톨스토이 등 소수를 제외한 동시대인들에게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37] 그러나 그의 시는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가사로 사용되었고, 20세기 러시아의 데카당파상징주의 시인들이 새로운 시적 경향을 모색하면서 재평가받게 되었다.[38]

3. 4.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대학 시절 독일 시인 하이네괴테, 그리고 슬라브주의 시인 니콜라이 야지코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러시아 문학계에서는 시가 시민으로서의 관심을 노래하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페트는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고[36], 시를 현실로부터의 도피 수단으로 여겼다[37]

페트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자연, 음악, 사랑을 노래하며 예술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투르게네프톨스토이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37]

하지만 그의 시는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가사로 채택되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데카당파상징주의 시인들이 러시아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페트의 작품은 다시 주목받고 재평가되었다[38]

4. 정치적 견해

페트는 자신을 특정 정치 이념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작가이자 전기 작가인 블라디미르 세멘코비치는 페트에 대해 "자유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단지 1840년대의 사람이자, 아니, 굳이 말하자면 1840년대의 마지막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세멘코비치는 페트가 동시대인들과 다른 점은 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며, 자신의 의견을 용감하게 밝히고 지배적인 사회 이론에 반대하여 말했기 때문에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에 배척당했다"고 덧붙였다.[29] 레프 톨스토이의 아들인 일리야 톨스토이 역시 아버지가 페트의 가장 큰 장점으로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꼽았다고 회상하며, "그는 항상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27]

페트는 1857년 파리에서 바실리 보트킨의 딸 마리아 페트로브나 보트키나와 결혼한 후,[16] 1858년 군 복무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5] 이듬해 오룔주 므첸스크 지역의 스테파노프카 땅을 구입하여 1860년부터 정착했다.[7] 그는 14년간 농업 경영에 힘써 황량한 땅을 번성하는 정원으로 가꾸고, 말 사육 농장과 제분소를 운영하며 성공적인 사업을 일궜다.[5] 1862년부터는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농업 경제 관련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17] 이러한 그의 행보는 미하일 살티코프-시체드린과 같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살티코프-시체드린은 페트가 "그들의 땅 구멍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 중 한 명"이라며, 문학 대신 "인간 혐오적인 에세이"를 쓴다고 비꼬았다.[13][18] 이반 투르게네프 역시 1861년 편지에서 페트가 "농학자, '절망에 빠진 지주'가 되어"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싫어하고 모든 정기 간행물을 비난한다고 썼다.[20] 그러나 페트 자신은 이러한 삶에 자부심을 느끼며, "신의 은총으로 오룔, 쿠르스크, 보로네시의 지주가 되었고, 공원이 있는 아름다운 영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음모가 아닌 힘든 노동으로 이루었습니다"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21]

페트는 농촌 생활과 노동을 중시했으며, 11년간 (1867–1877) 지역 치안 판사로 봉사하며 농민과 동료 지주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5] 그는 '가정의 숭배'와 함께 '시민적 노동'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에게 노동은 사랑과 유사하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과의 연결고리이자 사회에 조화를 되돌릴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이었다. 페트의 '노동 철학'은 낭만적인 자유 개념과 연결되어, 인간 성격의 자유로운 발달을 옹호하고 사회생활에 대한 과도한 규제를 경계했다.[13] 그는 "교묘한 가정교사는 자신의 대상(학생)의 보기 흉한 특징처럼 보이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린 전나무의 구부러진 가지를 잘라내면 그 나무를 죽이게 된다… 40년을 기다리면 곧고 튼튼한 줄기와 푸른 잎을 가진 나무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쓰며 개성의 존중과 자유로운 성장을 강조했다.[13][28] 레프 톨스토이 역시 야스나야 폴랴나로 은퇴한 후 페트가 "땅에 정착"하려는 결정을 지지했다.[19]

5. 유산과 영향

아파나시 페트는 사후 러시아의 주요 서정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작품은 후대 문학가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러시아 상징주의자들과 차이콥스키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들이 그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25][38] 그의 시 세계 형성에는 대학 시절 접한 독일 시인 하이네괴테, 그리고 슬라브주의 시인 니콜라이 야지코프 등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6] 페트는 예술 지상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자연, 음악, 사랑 등을 주로 노래했으나[37], 사회 참여를 중시하던 당대 문단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어 생전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주로 문학가들 사이에서 인정받았다.[26][7]

5. 1. 문학적 유산

아파나시 페트는 사후 러시아 최고의 서정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생전에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 높이 평가받아 미하일 레르몬토프와 동등한 수준으로 여겨졌으며[8][9], 평론가 바실리 보트킨은 1843년 "봄의 본질과 그로 인해 고조되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러한 서정적인 통찰력은 이전까지 러시아 시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고 평했다.[2] 오시프 만델슈탐은 페트를 역대 최고의 러시아 시인으로 간주하기도 했다.[2]

페트의 시는 감각적이고 우울한 서정성이 특징이며, 종종 슬픔과 비극의 정서가 배어 있다. 그는 시를 현실로부터의 도피 수단으로 여겼고[37], 그리스 예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자연, 음악, 사랑을 주로 노래했다. 이러한 예술 지상주의적 경향 때문에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라흐마니노프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시를 가사로 즐겨 사용했다.[38] 표트르 쿠드랴프체프 교수 역시 페트를 멜로디가 풍부한 시의 대가로 보았다.[2]

차이콥스키는 페트를 "예외적인 현상"이라 칭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를 다른 일류 시인들과 비교하거나, 푸시킨, 레르몬토프, 알. 톨스토이, 튜체프와 유사점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의 가장 훌륭한 순간에 페트는 시의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 우리 [음악가들의] 분야로 과감하게 모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트를 생각할 때 종종 베토벤이 떠오른다... 베토벤처럼, 그는 단어에만 의존하는 아무리 강력한 시인이라도 닿을 수 없는 우리 영혼의 줄을 건드릴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다.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음악가-시인이다."[25]

그러나 페트는 생전에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문학가들 사이에서 인정받았으며[26], 일반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당시 러시아 문학계의 주류였던 사회 참여적인 시류를 따르지 않고[7], 경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인 입장을 취하며[36] 예술 자체에만 몰두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투르게네프톨스토이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동시대인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37]

그의 작품은 20세기 들어 데카당파상징주의 문학가들이 러시아 시를 쇄신하려 하면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38] 특히 러시아 상징주의자들, 그중에서도 인노켄티 안넨스키와 알렉산드르 블로크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블로크는 페트를 자신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불렀다. 이후 세르게이 예세닌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참조

[1] 문서 Later Carolina Foeth too came to Russia where she married Alexander Matveyev, the rector of Kiev University.
[2] 서적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Pravda Publishing house 1988
[3] 문서 It was this humiliation, scholars later opined, that accounted for the idiosyncrasies of a man who spent most of his life contemplating suicide. This outcome, though, was not the worst of possible evils: as an illegitimate child he fell to the bottom of the Russian social hierarchy.
[4] 문서 There are several marginal theories as to Fet's parents' origins. According to one of them, advocated by the Russian women's magazine ''Sudarushka'', Charlotte Becker descended from an "ancient aristocratic family based in East Germany" while Johann Foeth was an illegitimate son of Louis I, Grand Duke of Hesse, which supposedly made Afanasy Fet a cousin of Maria Alexandrovna.
[5] 서적 A.A.Fet. Biographical sketch. Lyrical Poems Moscow 1894
[6] 웹사이트 The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http://az.lib.ru/f/f[...] az.lib.ru 2011-10-10
[7] 웹사이트 Afanasy Fet: the Poet and the Man http://az.lib.ru/f/f[...] Remembering A.Fet. Foreword by D. Blagoy. Compiled by A.Tarkhov Moscow. Pravda 2011-10-10
[8] 문서 Belinsky, V.G. Vol. VII, pp. 636–637; Vol. VIII, p. 94
[9] 간행물 Belinsky's letter to Vasily Botkin "Otechestvennye Zapiski" 1840-12-26
[10] 서적 Poems Moscow 1988
[11] 서적 Early Years of My Life (Rannye gody moyei zhizni). "The Correspondence of Fet and I.P.Borisov". Petersburg, Mysl Publishers 1922
[12] 간행물 Literaturnaya Mysl
[13] 웹사이트 Afanasy Afanasyevich Fet http://az.lib.ru/f/f[...] "Russian Writers". Biobibliographical Dictionary. Moscow. Prosveshchenye. Vol 2. Ed. P.A.Nikolayev 2011-10-10
[14] 간행물 From Russian Literature's Past. Turgenev and Fet ''Publishing and Revolution'' magazine 1923
[15] 서적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Moscow. Pravda 1988
[16] 서적 Poems. Letters Moscow 1988
[17] 서적 My Memories. Part 2
[18] 서적 The Works by M.E. Saltykov-Shchedrin Moscow 1968
[19] 서적 The Complete L.N. Tolstoy 1860-02-23
[20] 서적 The Complete I.S. Turgenev. Letters 1861-05-21
[21] 서적 The History of the 13th Dragoons Regiment Saint Petersburg 1912
[22] 간행물 Shakespeare as Translated by Fet ''Sovremennik'' 1859
[23] 서적 The Complete of...
[24] 서적 The Death of Afanasy Afanasyevich Fet. "А.А.Fet.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Moscow. Pravda 1988
[25] 웹사이트 Landowner Shenshin and the Poet Fet http://www.c-cafe.ru[...] www.c-cafe.ru 2011-10-10
[26] 서적 The Works of V.P. Botkin Saint Petersburg 1891
[27] 서적 А.А.Fet.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Moscow. Pravda 1988
[28] 간행물 From the Country ''Zarya'' (Заря) magazine 1871
[29] 서적 А.А.Fet.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Moscow. Pravda 1988
[30] 문서 Т.А.Kuzminskaya on А.А.Fet
[31] 서적 А.А.Fet.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Moscow. Pravda 1988
[32] 서적 The Complete L.N.Tolstoy 1866-11-07, 1874-06-24, 1869-08-30
[33] 서적 А.А.Fet. Verses and Poems. Contemporaries on Fet Moscow. Pravda 1876-04
[34] 문서 Translated by Yevgeny Bonver 2001-03
[35] 서적 소비에트文学 新潮社 1958
[36] 서적 ロシア文学の理想と現実(下) 岩波文庫
[37] 서적 ソビエト文学 新潮社
[38] 서적 ロシア・ルネサンス みすゞ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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